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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주문형 출판(POD), 잘나가는 일본 VS 막나가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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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거의 9년 전 사무자동화기기 일을 잠시 했었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맞게 낙후된 사무기기 비즈니스의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일이 저의 주요 미션이었는데 당시 일본 자료를 뒤적이다 재미있는 단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주문형 출판(Ondemand Publishing)'이라는 참 보기만 해도 폼나고 멋진 단어였습니다. 그 단어를 보는 순간 비즈니스 모델이 처음부터 끝까지 쫙하고 그려지더군요. 그래서 그걸 사업계획서로 만들었습니다.

꿈이 현실로 창업을 이루다

하지만 오너는 별다른 의지가 없더군요. 하긴 당장 눈 앞의 현실과 미래의 비전을 바꾸기가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전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고 그 사업계획서를 못내 아쉬워하던 후배 한 명이 과감히 정통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장려상... 최초로 열렸던 벤처사업계획서 경진대회인지하는 곳에서 입상을 했더군요. ^^ 그리고 갑자기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업자금이 들어오고 묻지마 투자가 일어나던 상황. 솔직히 당시 나쁜 마음만 먹었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돈을 만져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 후배 욕심을 내지는 않더군요.

결국 어렵게 창업을 했고 국내에서 그 말도 안되는 '주문형 출판'을 해보겠다고 서비스 개발에만 3년 정도를 메달렸던 것 같습니다. 물론 후배를 전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했지만 옆에서 늘 지원하는 마음은 한결 같았죠. 당시 일본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차이가 결국 지금의 격차로 남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출판 산업은 크게 3가지 분야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저작 부분, 그 저작물을 하나의 완성된 책으로 만들어내는 제작 부분 그리고 독자들에게 그 책을 전달하는 유통 부분입니다. 뭐 이건 학술적으로 여러 논의가 있겠지만 그냥 편의상 이렇게 나눠봤습니다. 사실 '주문형 출판'은 출판의 핵심 세부분 모두에서 큰 변화를 일으킬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작부터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도 컸습니다.

일본의 주문형 출판 현장을 가다

그와 관련해 그 후배의 일을 돕고자 일본 '주문형 출판'의 선두주자인 '콘텐츠웍스'라는 회사를 방문했었습니다. 당시 부러웠던 것은 일본의 출판 시장 자체가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또한 그 회사의 주주 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핵심 주주는 후지제록스와 마이크로소프트 재팬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힘이라면 휴.. 성공못하는게 오히려 이상하겠죠. ^^

당시만 하더라도 주문형 책을 만드는 프로세스는 일본과 한국이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량 출력 및 소부수 제본의 결합 형태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들이 놀란 것은 대량 출력의 한국쪽 단가였습니다. 몇번을 다시 확인하며 계속 감탄사를 연발하더군요. ^^ 하긴 환율만 당시에는 10배 차이인데 얼마나 놀라겠습니까?..ㅋㅋ

하여간 그런 연유로 일본 북페어에서 '주문형 출판'에 종사하는 여러 회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기억나는 곳은 대일본인쇄의 사내 벤처였던 회사입니다. 역시 대일본인쇄는 책을 생산하는 일본 최대의 기업이며 그 자금력이나 탄탄함이 정말 대단한 회사입니다. 그런 회사가 미래의 출판 환경 변화에 대비해 '주문형 출판' 사내 벤처를 만들어 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잘하면 좋은 파트너를 만날 수 있겠다는 순진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한국의 출판 업계는 당시 전자책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파일형태로 책을 유통시키면 인쇄 비용과 유통마진없이 사업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래서 잘나가는 출판사들이 모여 콘소시엄도 만들고 아주 돈도 많이 투자를 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책은 종이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 파일만의 유통은 생각하기 힘들다고 설득하고 절판도서나 효율적인 자비 출판 등에서 '주문형 출판' 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더군요.

뜨는 일본 VS 가라앉는 한국

그런 와중에 몇 년이 후딱지나가고 자본은 고갈되고, 서비스 개발은 점점 힘들어지더군요. 하지만 그 사이 일본의 '콘텐츠웍스'는 사진 부분에서 소형 앨범을 제작해주는 서비스를 오픈해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포토백'이라는 서비스인데 CD케이스 크기의 소형 사진집을 고객이 직접 온라인 상에서 편집하고 제작해주는 서비스입니다. 물론 온라인 앨범의 역할도 병행하기에 사용자도 꽤 많이 확보한 듯 싶습니다. 특히 플래시로 구성된 프론트는 사용자가 아주 쉽게 직접 사진을 드래그앤드롭하면서 자신의 사진집을 구성하고 캡션과 제목 등을 직접 써넣도록 되어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이 때부터 국내의 '주문형 출판'과 일본의 '주문형 출판' 시장은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대자본 그리고 기존 출판 관련한 기업들과 함께 고민하고 성장하지 못한 우리의 한계가 보이더군요.

결국 국내 최초로 '주문형 출판'을 모토로 출발했던 사업체는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 후배는 한국에서의 비즈니스가 너무 척박하다며 미국으로 날아가 셔터맨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자 일본경제신문에서 다시 '콘텐츠웍스'를 만났습니다. 또 멋진 서비스를 런칭했더군요. 자비출판과 엽서, 명함을 하나의 패키지로 엮는 '온라인 개인용 출판 서비스 logpapaer'를 시작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예상했던 것처럼 인터페이스는 프론트는 플래시로 되어 있고 뒷단은 XML 기반으로 되어 있는 듯 합니다. 하긴 사업 초기부터 XML을 꾸준히 해왔으니 이제는 도가 터있겠죠..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 일본에서 런칭된 개인형 출판 서비스의 편집 화면

이 뉴스를 접하니 한편으로 씁쓸했습니다. 국내에서는 늘 별 힘없는 업체들이 '주문형 출판' 한번 해보겠다고 뛰어들지만 속속 문을 닫고 맙니다. 그게 현실이라는 것이 안타깝더군요. 하긴 각 출판사들도 여력이 없을겁니다. 국내의 대형출판사들은 학습지 팔기에 정신없으니 출판의 미래를 준비해야하는 대의에는 별 관심이 없겠죠.

출판 시장은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존의 책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미 책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나 유통하는 과정에서도 작은 변화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미래 출판의 큰 축이 될 '주문형 출판'에 대한 큰 고민과 도전은 일본에 비해 너무나 뒤쳐지고 있다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내가 해보려고 했던 것에 한번 좌절하고나니 크게 용기가 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멋지게 성공하는 모습은 정말 한번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

오늘 일본 뉴스 한 줄에 지난 10년의 비즈니스가 회상이 되어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신 잘되는 블로그 계명 중 지켜진게 별로 없는 포스트 같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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